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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티벳·히말라야/책

[책]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 : 지리산에서 히말라야까지, 청전 스님의 만행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 : 지리산에서 히말라야까지, 청전 스님의 만행
2010년 1월 22일 / 청전 스님 / 휴(休) / 12,000원


* 책 소개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북인도 다람살라에서 23년째 수행중인 해동 비구 청전 스님의 불교 에세이. 이 책은 신학교에서 송광사로, 송광사에서 다시 인도 다람살라로 수행을 위해 떠돌아다닌, 30여 년 만행길 위에서 펼쳐지는 감동적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수행이란 바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한없이 엄격하게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수행길 위에서도 힘없는 이들을 챙기는 일을 가장 우선순위로 둔다. 다람살라 거리에서 하루에 몇 번씩 마주치는 거지들, 매일 포행하며 만나는 거리의 강아지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부처님을 섬기듯 살뜰히 보듬는다. 풋중 시절 행각하다 만난 어르신들과의 따뜻한 에피소드, 착한 삶을 물려주신 부모님을 비롯한 고향 어르신들, 꽃장화를 엿과 바꿔먹은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했던 모습 등의 에피소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책은 30여 년 만행길에 쌓아온 인연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행복은 곁에 있는 이웃과 가슴으로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 싹튼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게 한다.


* 저자
청전 스님
23년째 다람살라에서 수행중인 달라이 라마의 제자. 1972년 유신 선포 때 사회에 대한 자각으로 다니던 전주교대를 그만두고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게 첫 번째 출가였다. 그 뒤 신학교에서 신부수업을 받다 1977년에 송광사로 두 번째 출가를 감행하였다. 10여 년간 참선수행을 하다가 수행 과정에서 떠오른 의문들을 풀기 위해 1987년에 동남아의 불교국가들을 둘러보는 순례길에 나섰다. 그때 마더 데레사 등 여러 성자들과 더불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될 달라이 라마와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1년간의 순례여행을 마친 뒤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1988년부터 지금까지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공부하고 있다. 매년 찻길도 없는 해발 5천 미터 산속 곰빠(티베트 불교사원)에서 생활하는 망명 티베트 노스님들을 위해 한국에서 공수해간 중고시계부터 의약품, 보청기, 손톱깎이까지 져 나르는 일도 수행의 큰 축이다.

인도 생활을 마치기 전에 해야 할 숙제가 있다.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한국의 거사님이 내신 숙제인데 ‘달라이 라마의 온화한 미소를 배워오라’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 기약은 없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면 가장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 그리고 종교간 화합을 위해 정진하는 성직자의 삶을 꿈꾼다.

티베트 원전 『깨달음에 이르는 길』(람림)과 『입보리행론』을 번역했고, 저서로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낸 20년』, 『나는 걷는다 붓다와 함께』가 있다.


* 목차
머리글: 붓다를 닮은 사람들과의 동행

1부 행각(行脚)
송로사 할머니
일월산 아래 노부부
안상선 할아버지의 ‘관시염보살’
비둘기호 열차에서 만났던 가출 노인
외로운 노인들과 함께 하는 양로원
간첩신고
백다섯 살 드신 극(極) 노인과의 겸상
첫 선방, 지리산 백장암
풋중 시절

2부 항상 고향입니다
눈도 안 뜬 강아지
꽃장화
저승 구경하신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가사삼성(家事三聲)
지순한 신심으로 살다 가신 할머니
유년 시절 어머니의 한 말씀
초등학교 입학식
너 서울 가봤어?

3부 천축의 풍찬노숙(風餐露宿)
인도는 인도다
불단의 탱화 한 점
가슴에 새겨진 그림들
잊을 수 없는 거지
겐 틴레 스님의 시계
당카르 곰빠 스님들의 소원
1백 권의 책을 권하며 드는 생각
히말라야 낚시꾼과 여수바다 나무꾼
33년 만에 걸려온 전화
혼이 배인 불상
아빠 스님, 엄마 스님
라닥 노스님들의 티베트 순례
한국을 찾은 히말라야 스님들
인도 촌놈의 첫 유럽
윤 신부님의 선종
맑은 종교, 푸른 종교인

맺는글: 나의 종교는 민중입니다


* 책 속으로
해제 철이라도 늘 송광사에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없을 때에 고기리의 촌로 분들께서 들른 것이었다. 얼마나 서운했을까.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원주 스님께서 큰 방 두 개를 내드리고 드실 차담도 많이 드려서 하루 잘 쉬다가 떠나셨다고 한다. 그리고 노인네들이 나에게 가져온 것이라며, 제법 무겁고 큰 대나무 반합을 내주셨다. 열어보니 전부 노란 계란이었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나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 코끝이 찡해왔다. 그 계란들은 농막 일군들에게 드렸지만, 편지에는 우리 스님들이 잘 먹었다고 써서 보냈다. -40쪽

수행이란 뭔가. 우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가.
똑같이 먹고 자겠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런 공간을 꿈꾼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힘닿는 대로, 드러내지 않고 노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평생 쉼터, 여생터를 만들고 싶다. 그야말로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인간의 집’을 차려보고 싶다. -54쪽

함께 정진하던 일오 스님은 바로 월인 노스님의 상좌 스님인데, 예전에 월남 파병부대인 맹호부대에 있을 적 휴가 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당시 자기 상좌가 월남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노스님은 깜짝 놀라시며, “뭐라고! 월남에 가게 되었다고. 그러면 싸움하는 전쟁, 아니 살생하러 가는 것 아니냐! 이거 큰일 났다. 출가해서 사람을 죽이는 전쟁터에 나가다니, 이걸 어쩔꼬!”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월남 가서 싸움할 때 꼭 사람 없는 곳에만 잘 보고 총을 쏘아라!” -71쪽

인도에 돌아온 후 그 그림들 생각이 나서 그곳을 안내해주신 신부님에게 성모자 그림의 복사본을 받아 지금 내 방에 걸어두고 있는데 어지간한 크기라서 벽 한 면이 꽉 찬다. 어느 분에게 라파엘의 성모자는 항상 소장할 만한 그림이라고 말했더니, 스님 마음이야 알겠지만 종교적 편견으로 스님 욕하는 사람 많을 터이니 조심하라고 하신다. 아니다. 내 조용한 처소에는 늘 불화와 함께 그 그림을 꼭 모셔둘 것이다. -140쪽

(…) 그랬더니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내 귀에 바짝 입을 갖다 대고 속삭인다. “스님 외롭지 않으세요?”
‘아니 이 여자가!’ 뒤로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여자 손목 한 번 잡아보지 않았던 내 정서에, 그 여자의 말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아니 지옥에서 나를 불러들이는 말이었다. 황망한 마음에 큰소리로, ‘스톱!’
운전수가 무슨 큰일이 일어난 줄 알았는지 갓길에 버스를 대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내게는 정말 큰 사건이었기에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 내려야 해요!”
허겁지겁 바랑을 챙겨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무작정 내렸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략) 이것도 풋중 시절 이야기다. -76쪽

해마다 라닥을 찾다 보니 곰빠의 스님들부터 마을 주민들까지 모두 얼굴을 익히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중 리종 곰빠 스님들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이상하게도 리종 곰빠에는 노스님들이 많은데, 매년 이곳에 내려와 겨울을 나고 리종으로 돌아가시는 두 노스님이 계시다. (중략) 2003년 어느 공부가 많이 된 스님이 이르시길, 이 두 스님은 전생에 몇 대에 걸쳐 부부 인연으로 살았으며 금생에는 한 곰빠의 비구로 살아간다고. 그러려니 했는데 먼 전생의 한 번은 이 두 스님이 내 부모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부모님 모시듯 하나에서 열까지 두 분을 배려한다. (중략) 인도에 사는 동안 이 두 노스님과 함께 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조석 예불 때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시기를 늘 축원한다. -193쪽

그해 여름, 라닥에 들어가니 노스님들의 성지순례 소문이 라닥 전역에 퍼져 있었다. 가는 곳마다 자기도 좀 티베트에 데리고 가달란다. 마음이야 70을 넘기신 노스님들만이라도 모두 티베트에 모셔가고 싶었지만 ‘이 세상 제일 부자’인 나도 한계가 있었다. 경비는 자기들이 알아서 준비하겠다며 가이드만이라도 해달라신다. 결국 노스님 10여 분의 여권을 모두 발급받아두었다. 그런데 뉴델리의 중국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정지해버렸다. 베이징올림픽 전후에 일어난 티베트 사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분들은 비자가 나오기만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비자만 나오면 만사 제쳐두고 네팔을 통해 육로로나마 티베트 순례를 성사시켜드릴 것이다. 이번에도 얼마나 우실지…. -210쪽

절집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게 청빈, 청정, 하심이었다. 가난하며 맑게 살고 겸손 속에서 실천하는 수행은 저절로 성도의 길, 깨달음의 길에 이르게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사실 이 가르침은 출가 전부터 배워 몸에 익히고 있던 거룩한 말씀이기도 했다. 천주교에서 수도자의 삼덕이란 청빈, 순결, 순명을 일컫는다. 청빈은 무소유의 가난이며, 순결은 청정함이고, 순명은 하심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수도자로서 이 세 가지 명제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신부가 됐다면 이 세 가지 덕을 제대로 갖추었을까. 참으로 생각만 깊어간다. (중략) 나는 아직도 수도자 삼덕에서 멀리 떨어진 길 위에 있음을 알아차린다. -233쪽

새 신부님의 첫 순회라 신도 분들이 대접한다고 가는 곳마다 진수성찬을 차려주셨다. 끼니때마다 우리 절집의 풀밭이 아닌 울릉도 특산 먹거리가 넘쳤다. 살판났다. 죄다 내가 집어먹는 꼴이었다.
한 공소에서다. 그곳도 역시 진수성찬. 윤 신부님과 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았다. 그때 한 신도 분이 좀 불만스러웠는지 조심스런 말투로 “저 신부니임, 저 시님이 누군디, 이렇게 신부님과 함께 진지를 잡숴도 되나요?” 나올 만한 질문이었다. 신도인 그분 입장에서는 주임 신부님이 생판 모르는 삭발 승려와 겸상을 한다는 게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윤 신부님은 제법 신중하게, “쉿! 조용히 하세요! 아무 말씀 마시고 맛있는 거 있으면 더 챙겨오세요. 지금 이 스님이 개종하러 왔거든요.” -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