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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2010년 8월 10일 / 테리 이글턴 / 모멘토 / 12,000원


* 책 소개
21세기 들어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이른바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의해 다시 지펴진 신에 관한 논쟁.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정말 무용지물인가? 이성은 믿음 없이 홀로 설 수 있을까?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리즘은 왜 생겨났으며, 세계화된 자본주의하의 고달픈 삶에서 믿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마르크스주이자의 시선으로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 해답을 전개하고 있다.

박학한 좌파 이론가이자 탁월한 논쟁가인 테리 이글턴은 이 책에서 새로운 무신론자들, 이른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세계관을 해부하고 반박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의 앎과 삶 전반에 관한 비판적 관점과 분석틀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무신론을 비판하는 특이한 경우다.) 예수 시대에서 중동의 최근 역사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9.11까지, 에우리피데스에서 토마스 만과 살만 루슈디, 슬라보예 지젝까지,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오가며 그는 과학과 신학, 합리성과 진보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와 인간해방, 문명과 문화와 야만에 관해 예리한 해석을 제시하고 우리가 이뤄내야 할 세상의 비전을 그려 보인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삶의 기본 조건과 관념들, 그리고 역사를 다시금 곱씹어 보라고 우리를 자극하기에, 이 책은 다소 독자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안겨주기도 한다. 특히 믿음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준다. 과학자와 신학자, 종교인뿐 아니라 신에 관한 논쟁의 초점과 배경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일반 독자에게 ‘불현듯 눈이 밝아지는’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 저자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맨체스터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와 20세기 영미문학을 연구하면서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폭로하는 데 주력했던 그는 문화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왕성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동시에 영국 내의 좌파 조직에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 재학 중에 이미 가톨릭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사회·정치·문화론에 관한 글을 썼다. 그 후 구조주의 기호론, 정신분석학 등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유물론적 문예론을 펼쳐나갔다. 서구사회에서 문학이 담당해온 역할에 다분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문학이라는 대상의 이데올로기적 배후를 살피고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트리니티 대학, 캠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이 알튀세의 영향을 받았으며, 슬라보예 지젝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학문의 세계를 여전히 넓혀나가고 있다. 2003년에 펴낸 『이론 이후』에서는 그간의 태도와 달리 문화이론과 문학이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대적인 것 거부를 비판하며 절대적인 것, 진리를 옹호한다.


역자 강주헌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브장송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등에서 언어학을 강의했으며, 2003년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뛰어난 영어와 불어 번역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처음에 그는 전문적으로 번역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좋아서 취미로 하던 번역 작업이 IMF 구제금융 위기 사태가 발생한 후, 생계수단이었던 창고업을 그만두면서 번역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번역과 공식 인연을 맺은 것은 『여자는 왜 여자답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번역한 책으로는 『문명의 붕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지식인의 책무』,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영한대역), 『스펜서 존슨의 선물』(영한대역),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 『우체부 프레드』, 『오프라 윈프리, 위대한 인생』, 『나의 프로방스』,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예수처럼 기도하라』,『리더십골드』 등 100여 권이 있고,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 등을 썼다.


* 목차
서문
1장 인간 쓰레기
2장 배신당한 혁명
3장 믿음과 이성
4장 문화와 야만
옮긴이의 글
추천의 글
인명 해설


* 요약
'이글턴은 무엇을 말하는가 - 몇 개의 하이라이트'

디치킨스 - 신에 무지한 무신론자들

『신을 옹호하다』의 주된 논적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이며 새로운 무신론자의 대표 격인 도킨스와 히친스, 그리고 편의상 그 둘을 합성한 인물인 ‘디치킨스’다(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점도 적잖지만 과학과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여 절대적으로 대립시킨다는 점에서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예컨대 기독교 신앙을, 과학과 대립되는 우주관을 제시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야바위 이론이라고 여긴다. 이글턴의 풍자를 보자.
“이런 점에서 도킨스는, 소설을 서툴게 짜깁기한 사회학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소설이라는 형식의 취지를 이해 못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 책을 읽으면 그만인데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과 힘들게 씨름할 이유가 뭐냐는 식이다.……크리스토퍼 히친스도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망원경과 현미경 덕분에 [종교는] 이제 어떤 중요한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애초부터 뭔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따라서 히친스의 말은 전기 토스터가 나왔으니 체호프는 잊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아퀴나스에게 하느님은 우주의 생성을 놓고 과학과 경쟁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실 아퀴나스는 세상에는 어떤 기원도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도킨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일종의 범주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신학은 대부분의 경우에 같은 종류의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치과 교정학과 문학비평의 대상이 다르듯이 말이다. 이는 과학과 신학 간에 어처구니없는 오해들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다.……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은 충분하게 멀리 올라가지 않는다. 왜 애초에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렇게 생겨난 사물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것은 어째서인지 같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인 것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둠과 고통과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이다.”

예수 - 자기를 버리며 세상 바꾸기
“신약 성경에는 영웅적이라 할 이야기가 없다. 예수는 구세주치고는 너무나 구차스럽다. 메시아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지 않는다.……그러나 예수 시대에 산 독실한 유대인이라면 하느님의 것에는 정의를 위해 힘쓰는 일과 이민자를 따뜻이 맞아주는 일, 잘살고 힘 있는 사람들의 콧대를 꺾는 일 등이 포함된다는 점을 알았을 터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처형당한 예수의 몸은 온갖 패배자와 낙오자, 하층민, 그리고 부역자들에게 바쳐진 새로운 성전이 된다. 그는 못쓰게 돼버린 우리 세상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전위적으로 보여주고 깨우치라고 촉구한다. 과거의 모든 형상과 언설을 뛰어넘는 체제, 정의와 우애가 살아 숨 쉬는 세계 말이다. 그런 삶이 진정 가능한지를 양파 값을 아는 식으로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우리에겐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여도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 이것은 냉정한 현실주의이며, ‘역사는 아직 꾸준하게 발전하는 중’이라는 디치킨스의 순진한 승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인간 조건의 적나라한 시니피앙은 사랑과 정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이 인류 역사의 충격적 진실이다. 죄 없이 고통받은 사람의 그런 끔찍한 형상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류의 무한정한 진보라는 순진한 꿈을 곧이곧대로 믿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꿈은 디치킨스가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적이며 현실적인 정의의 핵심은 역시 사랑이다.
“기독교가 직관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세계관의 중심에 사랑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말을 인정하기가 어려워진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역사의 중심이 아닌 게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사랑마저 실질적으로 사유화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다.”
이글턴이 전하는 신학에 굳이 해방신학이란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을 테다. 모든 진정한 신학은 해방의 신학이므로. 그리고 그 해방엔 동과 서의 구분이 없다.
“우리는 9 11 사태 이후 인종차별주의가 지식인 세계에서 다시 존중받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히친스, 마틴 에이미스, 살만 루슈디, 이언 매큐언 같은 자유주의 문인들은 그들이 편협하고 몽매한 이슬람주의라고 적절하게 규정한 것에 맞서서 ?유로? 표현의 가치를 웅변적으로 역설해 왔다. 이는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살만 루슈디는 얼마 전 자신이 이제 정치에서 아주 멀어졌다고 선언했는데, 서구에 사는 그의 동족들이 오래전 식민 지배 아래 놓였던 시절 이후로는 유례가 없는 사나운 공격을 받고 지독한 모욕과 경멸을 당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이는 희한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혁명적 기원, 누추한 배신
기독교 비판자들이 지적으로 조잡해진 데 대한 일차적 책임은 기독교 자체에 있다. 역사적 운동 중 기독교처럼 그 혁명적 기원을 누추하게 저버린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오래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부유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런 유의 신자들은 여자의 노출된 젖가슴에는 호들갑을 떨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끔찍한 불평등에는 무덤덤하다. 낙태에 대해서는 한탄하면서도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이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에 대해선 동요하는 빛이 안 보인다.……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은 테러의 유일한 치유책이 정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신앙의 성서적 유형과 이데올로기적 유형의 차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해내는 일”이 필요한 셈이다. 한데, 종교가 그 주춧돌 같은 원칙들을 명백하게 저버렸다면 자유주의는 어떤가 계몽주의의 다른 후예인 정치적 좌파는 모두 스스로 내세운 이상을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 이성과 합리성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걸까.

믿음과 이성과 광기
“이성의 과잉은 일종의 광기로 귀착될 수 있다.……계몽주의가 내세운 이성이 더없이 소중하기는 해도, 그 자체와 정반대의 것을 불러오기 또한 쉽다는 사실이 이런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보의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과거란 선사시대의 원시림으로 추방해야 할 유치한 무엇일 따름이다.……과거를 지움으로써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과거가 결국은 복수의 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종교가 부흥하는 현상은 바로 이런 ‘억압된 것의 회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자기도취에 빠진 계몽주의적 이성은 종교적 신앙의 본질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제국주의의 역사와 그 후유증도 이성의 광기라는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서구의 논평자들은 이슬람의 테러 행위에 겁을 먹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지만, 그들이 속한 이른바 계몽된 문명사회가 저질러 온 숱한 잔혹 행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인 적이 거의 없다. 어째서 그들은 9 11 사태 이후에야, 다시 말해서 처음으로 그들 자신이 잠재적 공격 목표가 된 후에야 도덕적 분노를 요란하게 터뜨리기 시작한 걸까 피에 굶주려 우리의 팔다리를 날려 버리려는 광신자들을 비난하는 일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런 범죄가 자행되는 데에는 서구가 지난날 남들에게 저지른 치욕적 행위들이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기본적인 정의감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성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성이 없다면 우리는 시체와 다름없겠으나, 이성이 우리 존재의 궁극적 토대는 아니며, 우리의 전 존재를 뒤덮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리처드 도킨스도 이성보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부분이 많다.”
여기서 ‘믿음과 이성, 믿음과 지식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성은 그 자체보다 더 깊고 끈질기며 덜 허약한 내적 에너지와 자원에 기댈 수 있을 때만 주도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이러한 진실을 거의 간과한다.
“이성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성 자체가 아닌 다른 무엇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기반이 사랑과 성실, 평화로운 공동체 같은 게 아니라 주로 물질적 이익과 정치적 지배라면 믿음과 이성은 서로 헛돌면서 스스로를 희화화해 냉혹한 신앙주의와 합리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모든 이성적 추론은 어떤 믿음과 끌림, 기질과 성향, 관심, 기존의 헌신 등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종교적 신앙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대상에 관심이 끌려야만 그걸 완전히 알게 된다. 예컨대 여성해방운동에 뜨거운 관심을 가질 때 가부장제의 작동 방식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문명, 문화, 그리고 야만
21세기 들어 갑자기 하느님이 들먹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런 현상을 쌍둥이 건물의 붕괴와 광신적인 이슬람주의자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그게 큰 몫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종교에 대한 디치킨스의 모멸은 세계무역센터의 폐허에서 움튼 게 아니다. 그 테러 또한 뜬금없이 돌출한 게 아니다.
“서구가 거대담킷들을 내버리고 있던 시점에 하필 이슬람주의 테러라는 새로운 거대담킷이 돌출하여 서구를 당혹게 했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자본주의가 이제 유일한 선택이 됐다는 뜻으로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역사의 죽음’이라는 명제는 세계 지배를 꿈꾸는 서구의 오만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바로 이 같은 침략적 정책이 급진적 이슬람이라는 형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역사가 끝났다는 주장의 허위성이 입증됐다. 역사의 막을 내리려던 시도 자체가 역사의 막을 다시 올려준 셈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인간과 공동체들을 마구 짓밟고, 그 과정에서 사회 문화적 자유주의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유형의 폭력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의미에서도 테러리즘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선명하게 비춰준다. 그러나 서구는 타자만을 탓한다.
“우리 시대에 벌어진 현상 중 하나는 하느님이 문명의 편에서 야만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오늘의 하느님은 검은 피부의 분노하는 하느님이다. 나아가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야만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말할 수 있다.……여기서 문명이 보편성과 자주성, 번영, 다원성, 개성, 합리적 추론, 그리고 아이러니에 바탕을 둔 자기회의 등을 포괄한다면, 문화는 모든 무분별한 충성과 헌신을 뜻한다. 문화는 관습적이고 집단적이며 열정적, 자연발생적이자 무분별하고, 아이러니를 모르며 합리성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서구 세계에는 문명이 있고 나머지 세계에는 문화가 있다는 게 놀랄 일이 아니다.”
문화는 문명의 보편적 가치들을 구체적 삶과 매개해주는 것이어서 두 개념을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데도 이처럼 흔히 대비된다. 우리 시대에 가장 절박한 문제의 하나는 문명이 문화 없이 존재할 수 없는데도 문화와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종교는 문화와 문명 양쪽에 다 관여한다. 종교의 가공할 힘은 여기에도 기인한다.
“문명으로서 종교는 교리이고 제도이고 권위이며, 형이상학적 추론이고 초월적 진리다. 또한 성가대이고 성당이다. 반면에 문화로서의 종교는 신화이고 의식이며, 미개한 비합리주의이자 자생적인 감정이고, 어둠의 신들이다. 기독교는 문화로 시작했으나 그 후에 문명의 문제가 되었다.”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은 문화를 절대적이자 최종적인 개념적 마침표로 등장시켰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종교가 아니라 문화를 ‘인민의 아편’으로 삼는다. 하지만 문화가 종교의 대체물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는 없다. 예술작품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문화가 종교의 역할을 적절히 대신하지 못한다면 정치의 역할도 대신할 수 없다.……문화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지보다 우리가 지금 무엇이며 과거에는 어떠했는지를 확인하고 주장하는 일에 너무 치중한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떨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관습을 그처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상징형식이 종교 이외에 또 있었는가 ……종교적 믿음은 인간의 내면과 초월적 권위를 직접 이어주는 핫라인이다. 이는 문화의 옹호자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는 종교도 문화만큼이나 무력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종교는 그런 역할에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어 이글턴은 자신의 비극적 인본주의와 ‘인간에 대한 긍정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왕정복고 이후 미몽에서 깨어난 밀턴처럼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거인국의 왕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몽과 구역질을 넘어서고 자기 비우기를 거쳐야 하는 그 벅찬 긍정은 우리에게 언제에야 가능할 것인가.

따끔하고 불편하다가 무릎을 치는
『신을 옹호하다』는 원제 ‘이성과 믿음과 혁명’에서도 드러나듯이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자 자본주의와 정치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삶의 기본 조건과 관념들, 그리고 역사를 다시금 곱씹어 보라고 우리를 자극하기에, 이 책은 따끔하고 불편하다. 디치킨스와 그 추종자들뿐 아니라 그 반대편의 많은 신자들에게도 특히 믿음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거북스럽다. 동시에 이 책은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준다. 과학자와 신학자, 종교인뿐 아니라 신에 관한 논쟁의 초점과 배경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일반 독자에게도 ‘불현듯 눈이 밝아지는’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이글턴표’ 글의 강점은 거침없는 논리의 흐름, 읽는 이의 생각을 부추기는 통찰, 무릎을 치며 웃게 만드는 풍자와 비유들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결코 꺾이지 않는 희망이다. 저자가 굳게 믿는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설사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간 조건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분석과 주장을 이글턴은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중 가장 평범한 듯하면서도 가슴에 곡진하게 와 닿는 글귀 하나가 있다. 기독교를 옹호하는 이유에 관해서다.
“내 조상들이 온 삶을 바친 믿음이 무가치하고 쓸모없다는 비난에 맞서 조상들의 입장을 대변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을 지켜온 주의나 교리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민주주의 정신에 맞다.”

“이글턴은 희귀한 존재다. 이데올로기적이 아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인간조건에 대해 명민하게 이해하고 깊이 공감할 뿐 아니라, 세련된 유머 감각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도 생각 깊은 이들은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볼 것이다.”미국 도서관협회 서평지 『북리스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화를 돋우기도 하고 영감을 주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재미가 넘쳐난다.”
영국 서평지 『런던 리뷰 오브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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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화공간 아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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