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신 크리슈나
2010년 11월 25일 / 오쇼 라즈니쉬 / 슈리 크리슈나 다스 아쉬람
* 책 소개
하나만이 그대로 남아 있고,
많은 것들이 변하면서 지나간다.
하늘의 빛은 영원히 빛나고,
지상의 그늘은 날아간다.
화려한 유리 돔 같은 인생은
영원이라는 흰 빛을 오염시킨다.
크리슈나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수천 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고 오쇼는 말한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고 그는 덧붙인다. 크리슈나는 어떤 점에서 옳을까?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크리슈나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쇼는 그를 슈리 크리슈나, 바가반 크리슈나라고 하지 않고, 크리슈나라고 말한다.
나는 그를 완전하면서 전부인 존재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뒤집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진술도, 아무리 빈틈없는 것이라 해도, 크리슈나의 전부를 포용할 수는 없다. 그는 항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로 존재 한다······.
크리슈나의 우주성은 그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한 사람. 한 개인이 아니다. 그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는 단지 존재이다. 또한 그는 공(空)이다. 여러분은 그가 “거울 같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단지 그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비춘다. ······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크리슈나 속에서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은 크리슈나가 여러분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그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표현들이 크리슈나를 조금은 손쉽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쇼는 한 가지 관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크리슈나 속에서 자신들이 그에게서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려고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바가바드 기따에 대한 수천 가지의 주석서가 있다고 오쇼는 말한다. 주석을 다는 모든 사람들은 기따에 투영된 자신을 본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서로 다른 설명들이 많지 않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설명들이 거의 없다고 오쇼는 지적한다. 그러면 왜일까? 붓다의 말은 명확하고 분명하다. 그의 말은 완전하고, 명료하며, 논리적이다. 마하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하비라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자이나 띠르딴까라 주위에 다른 분파들을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크리슈나 주위에도 역시 분파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크리슈나에 대한 분파들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 숫자는 수만에 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오쇼는 말한다.
크리슈나에 대해 이렇게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크리슈나가 명확하거나 결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시스템이나 구조, 형태, 골격을 갖고 있지 않다. 크리슈나는 무형이며 영적이다. 그는 한계가 없다. 여러분은 그를 정의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오쇼는 크리슈나가 다차원적 공간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오쇼가 설명하려고 애쓰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매력이다. 그는 틀림없이 매우 고민했을 것이다. 크리슈나에 대한 오쇼의 비유는 종종 웃음을 자아낸다. 사람들이 붓다나 마하비라가 전장에서 유능한 전사로서 빛을 발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예수가 성모(Mary Magdalene)에게 플루트를 연주해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가? 예수가 죽은 방식과 크리슈나가 죽은 방식을 생각해 보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면 그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 예수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왜 크리슈나는 그가 그랬던 방식, 즉 완전히 무의미하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죽기를 선택했을까? 왜 그는 출구(죽음)에 대해 좀 더 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크리슈나는 “삼뿌르나 뿌루샤(sampoorna purush)”, 즉 완전한 인간이라고 불린다. 완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완전에 대한 우빠니샤드 학파의 정의에 따르면 “완전함은 완전함에서 나온다. 만일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앗아간다 해도, 여전히 완전함은 남아 있다.”
크리슈나에 대한 오쇼의 이해는 철학적인 수준, 오히려 보편적인 수준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꼬삼비(Kosambi)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사람이 존재했던지 안 했던지를 묻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오쇼에게 있어 그것은 하찮은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크리슈나가 태어나고 죽은 날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어떤 날이라도 괜찮을 것이다. 특별한 날과 시간은 크리슈나와 관련해서는 무의미하다. 그는 어떤 날에도 나타날 수 있다. 그는 어떤 시대, 어떤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쇼는 예수, 마하미라와는 달리 크리슈나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것은 크리슈나가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주 많이 출현했었지만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속해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 있어 그는 역사적이지 않다.
나는 크리슈나에 대한 여러 작품들을 읽어 보았다. 하지만 어떤 책도 오쇼의 책보다도 더 재미있지 않았다. 오쇼는 크리슈나의 혈통이나 그가 과거에 존재 했었던가 안 했던가 하는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는다. 오쇼는 바가바드 기따를 설명하려고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다. 실제로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고 오쇼는 말한다. 크리슈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크리슈나는 단지 아르주나의 머리를 반복해서 때리고, 그래서 아르주나가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쇼의 몇몇 설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책 전체를 읽도록 이끄는 것은 분명 오쇼의 설명의 신선함이다. 오쇼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 때때로 그는 자신의 말을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책이 오쇼가 크리슈나에 대해 했던 많은 이야기를 옮겨 쓴 책이라는 것이다. 강연에서 강연자는 번번이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원고 없는 강연에서 그 강연이 신중하게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앞서 했던 말을 부정할 수도 있다. 분명 그것은 오쇼의 스타일이 아니다. 월트 휘트먼처럼 그는 자신을 부정하며 변명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 있어 오쇼는 인도의 월트 휘트먼이다.
그런 이유로 크리슈나는 오쇼에게 큰 기쁨이다. 나는 오쇼가 종종 언급하는 그의 공에 대한, 크리슈나에 대한 생각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공이라니? 아니면 만(滿)인가? 아니면 그 두 낱말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인가? 존재하면서 비어 있는 그러한 것이 존재할까? 크리슈나는 삶을 축복한다. 그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크리슈나와 그의 플루트는 떼어 놓을 수 없다. 오쇼는 말한다.
“크리슈나는 스스로 플루트를 선택했다. 나는 크리슈나의 플루트가 삶의 축복과 인간이 이 은총으로 인한 삶에 감사함을 상징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크리슈나가 자신의 플루트를 연주할 때 그 멜로디, 그 희열은 그 자신에게 한정하지 않고 가슴으로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이들을 기쁘게 해 준다.” 내가 두려운 것은 오쇼가 비논리적으로 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오쇼가 많은 다른 책을 통해 모순되고 비논리적인 면을 보였기 때문에 나는 오쇼의 말들이 편집이 좀 더 잘 되어서 전해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때 편집자들은 아마도 오쇼는 그들의 눈에 그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과거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 가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것도 괜찮다. 크리슈나처럼 많은 오쇼들이 있기 때문에.
M.V. 까마스(Kamath)
뭄바이
* 저자
오쇼(Osho)
오쇼는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남들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이나 신념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진리를 체험하고자 했다. 21세에 깨달음을 얻은 그는 전통적인 신념에 의문을 던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현대인의 신념 체계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며, 현대인의 영혼에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파하였다. 그는 말한다. “나의 메시지는 교의가 아니며, 철학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일종의 연금술이며 변형의 과학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들,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다.” 뿌나에 있는 그의 대규모 공동체는 영적 성장을 위한 메카가 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명상, 치료, 창조적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옮긴이 : 김병채 (Sri Krishnadass)
그는 고정된 삶의 틀로부터 자유로움과 진리를 추구하였다. 1988년 12월 인도로 건너가 성자 요겐 드라지, 오쇼 라즈니쉬, 테레사 성녀, 달라이 라마, 나나가루 등을 만났다. 그 후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힘에 이끌리게 되고, 그의 제자 슈리 푼자와의 삿상을 통해 마침내 희열에 들었다. 그는 스승 슈리 푼자로부터 슈리 크리슈나 다스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이 땅에 슈리 푼자의 명석한 가르침을 나누고 있다. 지금은 대학에서 초월상담을 가르치고, 창원 북면에 슈리 크리슈나 다스 아쉬람(Bhagavan Sri Ramana Maharshi Center in Korea)에서 삿상을 주는 삶을 살고 있다.
* 목차
❂ 옮긴이의 말
❂ 들어가는 말
❂ 머리말
1. 미래는 크리슈나에 속한다
2. 크리슈나는 완전하고 전체이다
3. 붓다가 끝나는 곳에 크리슈나가 시작된다.
4. 종교는 아무런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하다
5. 당신 자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따르지 말라
6. 나체와 옷 입는 것은 공존해야 한다
7. 일을 축제로 만들라
8. 이기기를 원하지 않는 자만이 이긴다.
9. 우주는 상반하는 것들의 춤이다
10. 영성, 종교, 그리고 정치
11. 진기한 여자, 드라우빠디
❂ 경험에의 초대
* 책 속으로
결혼의 폐지와 함께 남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간의 모든 갈등이 선을 위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결혼으로 빚어진 갈등들은, 그것들은 충분할 정도 이상이지만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새로운 충돌들과 새로운 문제들이 일어날 것이며, 그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기쁨이 될 것이다. 이 행성 위에 살기 위해서는 문제들이 항상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은 문제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우리의 여정에 계속해서 오는 특별한 문제를 알 필요가 있다. 그 특별한 문제는 우리에게 살기 위해 주어진 사회 제도의 문제들을 참아 내는데 우리가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 할지라도 더욱 훌륭하고 더욱 높은 사회 제도와 더불어 오게 될 이 새롭고 친숙하지 못한 문제들을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우리는 저급하고 죽어 가는 제도에 묶여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어려움을, 우리의 진정한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더 새롭고 더 나은 문제들이 가능하다면, 그 변화로 나아가 그런 문제들과 맞붙어 싸워서 그것들을 해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지성이 감당해야 할 과제이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충분히 꽃피지 않는 한, 그는 삶의 영광과 장엄함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그는 빛을 잃은 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우둔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정말로 사막이다. 그래서 나는 문제들로 꽉 찬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이 둔하고 쓸쓸하고 죽어 버린 삶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작은 일화로 이 토론을 결론짓고 싶다.
작은 다발의 들풀들이 낡은 도시 벽의 갈라진 틈에서 보호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이 높은 벽의 갈라진 틈들에 의해 완벽하게 보호받았기 때문에 바람과 폭풍우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했다. 똑같은 이유로 햇빛도 그들을 태울 수 없었고, 폭우 또한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이 작은 다발의 들풀 이웃에 장미덩굴이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꽃이 있음으로 인해 이 들풀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를 열등하게 그리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느 맑은 날 아침에 이 들풀들은 신께 기도했다. “우리는 얼굴 없는 꽃으로 살만큼 살았습니다. 이제 저희를 장미로 바꿔 주십시오.”
신은 그 물음에 답했다. “어찌하여 불필요한 곤란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가? 장미의 인생은 매우 험난하다. 폭풍이 몰아치면 그것은 폭풍으로 인해 뿌리째 흔들린다. 꽃이 필 때면, 그것을 꺾으려 주위에 이미 어느 누군가가 와 있다. 너는 안전하게 보호받는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나 들풀들이 계속 주장하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보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위험스럽게 살고자 합니다. 24시간 동안만이라도 우리를 장미로 있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다른 들풀들이 소리쳤다.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가 듣기로 우리의 몇몇 조상들이 장미가 되겠다는 이런 열망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종족의 경험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요. 우리는 장미가 되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식물은 다시 말했다. “저는 별들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폭풍들과 싸우고 싶습니다. 저는 폭우 속에서 숨 쉬고 싶습니다. 저는 장미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신은 양보했다. 어느 맑은 날 아침 이 작은 들풀 다발은 장미가 되었다. 그리고 즉시 그의 시련과 고난들의 영웅담이 시작되었다. 폭풍우가 와서 그것의 뿌리를 흔들었다. 폭우가 와서 그것을 물속에 잠기게 했다. 한낮의 태양이 그의 꽃잎들을 불태우는 고통을 주었다. 그는 모든 순간에, 모든 방면에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다른 나이 많은 들풀들이 그 새로 태어난 장미 주위에 모여들어 말했다. “우리가 너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너는 말을 듣지 않았다. 너는 너의 오래 전의 삶이 얼마나 안전했는지 알지 못하는가? 그것이 그것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들은 오래되고 친숙한 문제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익숙해있다. 그것은 괜찮았다. 너는 너의 삶에 얼마나 많은 혼란들을 만들었는지 알기나 하니?”
이에 이 갓 태어난 장미는 말했다. “당신은 어리석다. 그 높은 벽으로 인해 보호받으면서 살아 가는 작은 들풀로 오랫동안 안전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24시간 동안만이라도 위험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 더 낫다고 나는 말한다. 폭풍 속에서 숨을 쉬고 그리고 바람과 싸우는 것은 위대했다. 나는 태양과 얼굴을 맞대었고 별들과 이야기했다. 나는 내 영혼을 성취했고 나는 너무나 만족한다. 나는 완전히 살았고, 그리고 나는 완전히 죽으려 한다. 당신의 삶에 관한 한, 당신은 살아 있는 죽음을 살고 있다.”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크리슈나에게 어떤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는 쉽게 돌아갈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을 매 상황, 즉 사랑과 애착, 성냄과 분노 속에 남을 수 있다. 아무것도 그의 텅 빔, 그의 고요를 깨뜨릴 수 없다. 그 무엇이 오고가더라도 그는 아무런 어려움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텅 빔은 긍정적이고 완벽하며, 살아 있고 역동적이다. 그러나 그것의 경험에 관한 한, 당신이 붓다의 텅 빔으로 가든 혹은 크리슈나의 텅 빔으로 가든 그것은 동일하다. 둘 다 당신을 희열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텅 빔은 당신에게 이완과 휴식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크리슈나의 텅 빔은 당신을 거대한 행위로 데려갈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능동적 공(空)‘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크리슈나의 텅 빔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말이 될 것이다. 붓다와 마하바리의 텅 빔은 ’수동적 공‘ 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희열은 둘 다에 공통적으로 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능동적 공의 희열은 창조적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희열은 그것 자신을 위대한 공 속에 녹일 것이다.
당신은 한 가지 더 물어볼 수 있다. 그런 후에 우리는 명상을 위해 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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